KBO 리그에서 20년 넘게 뛰며 수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았던 이용규 선수. 빠른 발과 집요한 승부로 상대 투수를 괴롭혔던 그의 야구 인생은 어땠을까요?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부터 불명예 은퇴까지, 그라운드 위에서 펼쳐진 23년간의 기록을 낱낱이 살펴봅니다.
KBO 리그의 살아있는 전설, 이용규 선수

1985년 8월 26일 서울에서 태어난 이용규는 170cm, 74kg의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KBO 리그에서 가장 끈질긴 선수로 손꼽혔습니다. 좌투좌타 외야수로 2004년부터 2026년까지 무려 23년간 프로 무대를 지켰죠. 그의 야구는 화려한 홈런보다는 집요한 출루와 빠른 발을 앞세운 기동력 야구였습니다.
LG 트윈스에서 시작해 KIA 타이거즈, 한화 이글스를 거쳐 키움 히어로즈에서 마지막을 보낸 그는 단순한 선수 이상의 의미를 가졌습니다. 2008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 2009 WBC 준우승 등 국가대표로서도 맹활약하며 한국 야구 역사에 깊은 발자취를 남겼거든요. 특히 상대 투수를 지치게 만드는 '용규놀이'는 야구팬이라면 누구나 아는 그만의 시그니처였습니다.
프로 데뷔와 초기 활약상

덕수정보고등학교를 졸업한 이용규는 2004년 KBO 신인 드래프트 2차 2라운드 전체 15순위로 LG 트윈스에 지명받았습니다. 하지만 데뷔 첫해는 대부분 2군에서 보냈고, 그해 11월 KIA 타이거즈로 트레이드되면서 진짜 프로 생활이 시작됐죠.
KIA 유니폼을 입은 2005년부터 본격적으로 1군 무대를 밟기 시작했습니다. 전 경기 출장하며 31개의 도루를 기록하는 등 빠른 발을 무기로 존재감을 확실히 드러냈어요. 당시만 해도 작은 체구 때문에 회의적인 시선도 있었지만, 그는 오히려 그걸 장점으로 바꿔버렸습니다. 낮은 타격 존과 뛰어난 선구안으로 볼넷을 골라내고, 출루하면 곧바로 도루를 시도하는 플레이가 팬들의 눈길을 사로잡았죠.
KIA 타이거즈 시절, 전성기를 열다

KIA에서 보낸 시간은 이용규 커리어의 황금기였습니다. 2006년 KBO 최다 안타 타이틀을 따내며 리그 정상급 타자로 우뚝 섰거든요. 이후 2006년, 2011년, 2012년 세 차례나 골든글러브 외야수 부문을 수상하며 최고의 외야수임을 증명했습니다.
특히 2012시즌은 그야말로 대박이었죠. 도루왕과 득점왕을 동시에 차지하며 공격의 선봉장 역할을 톡톡히 해냈습니다. 1번 타자로서 경기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어요.
| 연도 |
주요 수상 |
기록 |
| 2006년 |
최다안타, 골든글러브 |
KBO 최다 안타 달성 |
| 2011년 |
골든글러브 |
외야수 부문 수상 |
| 2012년 |
도루왕, 득점왕, 골든글러브 |
공격 부문 3관왕 |
이 시기 국가대표팀에서도 핵심 선수로 활약했습니다. 2008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 획득에 크게 기여하며 야구선수로서 최고의 영예를 맛봤죠.
FA 계약과 팀 이적의 주요 순간들

선수 생활 내내 여러 팀을 오가며 다양한 경험을 쌓았습니다. 2013년 시즌 후 첫 FA 자격을 얻어 한화 이글스로 둥지를 옮겼고, 2019년 1월에는 한화와 2+1년 총액 26억 원 규모의 두 번째 FA 계약을 체결했어요. 계약금 2억, 연봉 4억, 옵션 연간 4억이라는 조건이었죠.
하지만 2020시즌 후 한화에서 방출되며 은퇴 위기를 맞았습니다. 당시 많은 팬들이 그의 은퇴를 예상했지만, 2020년 11월 키움 히어로즈가 손을 내밀었어요. 1년 총액 1억 5천만 원이라는 파격적으로 낮은 금액이었지만, 야구를 계속하고 싶었던 그는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키움에서는 베테랑으로서 젊은 선수들을 이끄는 역할을 맡았고, 플레잉 코치로도 활동하며 선수 생활을 이어갔죠.
그라운드를 지배했던 독특한 플레이 스타일
이용규 하면 떠오르는 건 단연 '용규놀이'입니다. 상대 투수를 끈질기게 괴롭히는 긴 승부와 파울 커트로 투구 수를 늘리는 전략이었죠. 한 타석에서 10개가 넘는 공을 보는 건 예사였고, 이렇게 투수를 지치게 만든 뒤 볼넷을 얻어내거나 안타를 치는 게 그의 방식이었습니다.
좌투좌타 외야수로서 뛰어난 선구안과 정교한 콘택트 능력은 타고난 재능이었어요. 출루율이 높았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2025년 시즌 60경기 출장에도 타율 0.306, 출루율 0.429를 기록하며 나이가 무색한 실력을 과시했죠.
수비에서도 빛났습니다. 빠른 발을 이용한 넓은 수비 범위와 몸을 사리지 않는 호수비는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어요. 펜스를 향해 주저 없이 뛰어드는 모습은 그의 트레이드마크였습니다.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고 빛난 순간들
태극마크를 단 이용규의 활약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에서 처음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고 동메달을 목에 걸었죠. 하지만 진짜 하이라이트는 2008 베이징 올림픽이었습니다. 주전 외야수로 출전해 금메달 획득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거든요.
그 뒤로도 국제 무대에서 계속 맹활약했습니다. 2009년, 2013년, 2017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에 출전했고,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 2015 프리미어12에서도 금메달을 땄어요. 테이블 세터로서 경기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능력은 국제 무대에서도 빛을 발했습니다.
| 대회 |
연도 |
성적 |
| 도하 아시안게임 |
2006년 |
동메달 |
| 베이징 올림픽 |
2008년 |
금메달 |
| 광저우 아시안게임 |
2010년 |
금메달 |
| 프리미어12 |
2015년 |
금메달 |
| WBC |
2009년, 2013년, 2017년 |
다수 출전 |
선수 생활 말년과 갑작스러운 은퇴
키움 히어로즈에서 플레잉 코치를 겸하며 선수 생활 막바지를 보냈습니다. 2025년 연봉 2억 원에 계약하며 베테랑으로서 팀에 기여했고, 그해 개인 통산 2000경기 출장이라는 대기록을 세웠어요. 역대 22번째 기록이었죠.
2026년에는 연봉 1억 2천만 원에 플레잉 코치 겸 타격 코치로 재계약했습니다. 통산 400도루에 단 4개만을 남겨두고 있었고, 많은 팬들이 그가 이 기록을 달성하길 기대했어요.
하지만 2026년 6월 12일, 모든 게 무너졌습니다. 음주운전 사고를 일으킨 거죠. 23년간 쌓아온 명예가 한순간에 무너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결국 불명예 은퇴를 선언하며 프로 선수 생활을 마감했어요. 팬들은 실망과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고, 그 자신도 깊은 후회를 표했습니다.
이용규가 남긴 야구 유산
2011년 배우 유하나 씨와 결혼해 두 아들 이도헌(2013년생)과 이시헌(2019년생)을 두고 있습니다. 가족과 함께 SBS '오 마이 베이비' 프로그램에 출연해 단란한 일상을 공개하기도 했죠. 그라운드에서의 치열함과는 달리 가정에서는 다정한 아빠의 모습이었습니다.
은퇴 후의 구체적인 행보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음주운전이라는 불명예로 선수 생활을 마감했지만, 그가 그라운드에서 보여준 집요함과 근성, 빠른 발을 앞세운 기동력 야구는 많은 후배 선수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어요. 23년간 KBO 리그를 누빈 그의 발자취는 한국 야구 역사에 분명한 한 페이지로 남을 것입니다. 비록 끝이 아쉽긴 하지만,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과 수많은 국제대회에서의 활약은 영원히 기억될 겁니다.